HKASON            





예술에 준거한 체계 공진화   
                                                   
                                   

보는 내내 도대체 이게 뭔지 궁금했다. 집중해서 보고 난 다음에야 난 알았다. <탈착과 분열의 전조>는 입고 다닐 수 있는 조각이자 그림이다. 이 작품은 관객들 대부분이 나처럼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을 테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난해한 미술은 아니다. 펜으로 선을 그은 캔버스와 한옥의 창살을 떼온 것 같은 목재가 경첩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 직선적인 평면 형태 위에 긴 합판 조각과 노끈이 곡선을 이루어 결속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상상 속의 고문 기구 같기도 한 이 작품을 실제로 입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옷 가운데 하나로 순위가 매겨질 듯하다. 이쯤이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세계관과 접해도 되겠다.

이 작품이 상징하는 하카손 작가의 미술은 과거와 미래라는 두 방향을 향한다. 한쪽으로는 모더니즘 미술 이전의 우악스러웠던 아방가르드 시기보다 더 앞선 추상 조형을 향해 있다. 작품은 캔버스의 드로잉이 평면을 벗어나 공간으로 치닫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른 한쪽, 이미 현재가 품은 미래 속에 포스트 휴먼과 포스트 뮤지엄을 가늠하고 있다. 하카손은 대학에서 미디어아트와 패션디자인을 공부했고, 유학 시절에는 두 전공 영역이 통합된 인체 탐구 방법론으로 빠져들었다. 그 다음 과정은? 우리 모두 예상하는 그대로다. 작가는 로봇공학과 매체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 현재 실용 단계로 접어든 입을 수 있는 로봇의 원리, 매체 철학이란 지식체계 바탕에 깔린 진화심리학은 작가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술상과 인간상을 구현하도록 만들었다. 퍼포먼스 작품 (Perfect Match)가 그 산물이다. 무용수들이 웨어러블 로봇을 걸치고 일종의 서사를 펼친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작가는 노자의 무위사상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철학을 이론으로 스스로 끌어올렸다.

이제 생각하니까 재미있다. 이 글을 쓰는 난 그 무렵에 공진화(co-evolution) 개념이 속한 사회체계와 예술체계 이론의 이중적 코드를 탐구 중이었고, 하카손 작가 또한 공진화의 물질적 실체를 양면성으로 파악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니까. 안팎의 경계를 이루며 임계점이 불러오는 혼돈 속의 질서가 메타버스로 표현되는 지금, 그는 디지털보다 종이와 캔버스와 목재처럼 오래된 재료를 선호한다. 이런 자연 친화성은 전시 공간 속에서 화이트와 아이보리와 베이지와 그레이의 조합으로 시각적 일체성을 끌어냈다. 성산아트홀에서 공개됐던 전시엔 <탈착과 분열의 전조> 말고도 웨어러블 스크럽처 프로토타입 2호기에 해당하는 이 벽에 걸렸고, 신체의 안과 밖에 관한 탐색적 연작도 부조 형태로 선보였다. 작품은 현재로선 실험 단계인 탓에 작품의 마감 과정은 생략된 진행형이다.

더 개량된 성과물은 단계를 밟으며 나올 것이다. 이미 심미적 성취를 확인한 착용형 조각은 기계공학자로부터 외골격 체계와 새로운 소재 개발을 도움받을 예정이라 한다. 여기에 한의학의 경혈점과 심리학의 초월 명상 같은 신체 반응 기제를 한의학 전문의와 심리학자와의 협동 과정으로 적용하는 일도 포함됐다. 작가는 이렇게 나올 시제품을 무용가가 장착해서 남길 동작과 동선의 영상화 작업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그 모습은 어떤 걸까? 전적으로 새로운 행위일까? 아니면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복속한 서브 장르일까? 어느 쪽이 되었건 그걸 새로운 시도라고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하긴 모든 예술이 새로운 시도이긴 했다. 일단 나는 지금까지 작가가 자신의 통합적 세계관을 선언하는 의미를 중요하게 본다. 신체와 정신, 기계와 육체, 예술과 기술, 외피와 내포가 뒤섞인 하카손의 혼융은 앞으로 더 혼란스러워질까? 아니면 정제될까? 혼돈 그 자체의 외적 기괴함이 예측 가능한 질서로 되먹임될 수 있다는 점은 이제 백 년의 시간을 채운 신과학이 입증한 사실이다.



(윤규홍, 오픈스페이스 배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